주제없는 이야기

Let it enfold you (Charles Bukowski)

kugnuoy 2024. 4. 2. 15:40

평화와 행복에 당신의 몸을 맡겨라
청년이었던 시절
나는 그것들에 휩싸이는 것을 어리석고 순진하다고 치부했다
증오를 품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위태롭게 자라났다
완강한 태도로 태양을 곁눈질했다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특히 여자를 믿지 않았다
작은 방에서 지옥같은 삶을 살며
물건을 깨고 부쉈다
유리조각 위를 걸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모든 것에 맞섰기에 쫓겨나기 일쑤였다
옥살이를 하고 툭하면 싸우고 이상늘 잃었다
여자는 섹스와 모욕을 위한 대상일 뿐이었고
남자는 친구로 삼지 않았다
직업을 바꿔가며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내가 미워했던 것들은
연휴 아기 역사 신문 박물관 할머니 결혼
영화 거미 쓰레기청소부 영국억양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호두 그리고 오렌지색이다
대수학은 화를 돋우었고
오페라는 속을 긁어댔다
찰리 채플린은 협잡꾼에 불과했고
꽃은 호모들을 위한 것이었다
내게 평화와 행복은 열등함의 표식이었으니
나약하고 썩은 정신에나 깃들어 있다고 여기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 싸움을 벌이고 
자살시도를 거듭하고
많은 여자를 겪으면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남다르지 않았고 남들과 같았다
모두 큰 혐오를 품고도 시시한 불평으로 무마했다
나는 냉혹한 자들과 골목길에서 싸워봤으나
그들도 서로를 밀고 조금씩 물러나며
미미한 이점을 얻으려고 속임수를 썼다
거짓말이 무기였으며 계략은 무의미했으니
어둠이 독재자였다

난 조심스럽게 때때로 좋은 기분을 만끽했다
옷장 손잡이를 그저 바라보거나
어둠 속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욕망을 버릴수록 기분이 좋았다
이전의 삶에 지쳐버린 걸까
누군갈 말로 이겨먹는 데 더는 관심이 가지 않았으며
슬픔 속에서 삶을 잃어 술에 취한 가여운 여성에게 
올라타는 일에도 흥미를 잃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삶에 존재하는 독을 온전히 삼키지도 못했으나
삶의 일부는 미약하나마 마법 같기에
질문을 던져볼 여지가 있었다

난 어느순간 달라졌다
날짜와 시간은 모르겠으나 변화가 일어났다
내 안의 무언가가 긴장을 풀고 부드러워졌다
더는 남자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됐고
뭐든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비로소 보았다
카페 계산대 뒤 커피 잔들
인도를 따라 걷는 개
쥐가 내 옷장 위에서 말 그대로 멈춰 선 모습
몸도 귀도 코도 굳어버리니 작은 생이 붙들렸다
날 바라보는 눈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러고는 사라졌다
기분이 좋아졌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분이 좋았고
그런 일은 잦았다 예를 들자면
책상 앞에 앉은 상사는 나를 해고해야한다
결근을 많이 한 탓이다
상사는 정장을 입고
넥타이와 안경을 걸치고
내게 말한다 ‘자네를 해고해야해’
난 괜찮다고 답한다
상사는 그래야만 한다
아내와 집
아이들과 돈 나갈 일
아마 여자친구까지 있겠지
안타까워라
그는 붙들렸다
강렬한 햇살 속으토 걸어 들어가니
일시적일지라도 하루가 내 것이다

온 세상이 목을 조른다
모두 분노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속아
낙담하고 환멸을 느낀다
난 조금의 평화와 행복의 파편을 환대한다
그런 것을 마치 
인기 있는 여자나 하이힐, 가슴, 노래 처럼
기쁘게 껴안는다
오해하지 않기를
비현실적 낙천주의에선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해 그 태도를 유지한다
방패이자 질병이다

또 칼날이 내 목을 겨눠
하마터면 가스를 켤 뻔했다
하지만 좋은 순간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골목길의 적처럼 물리치지 않고
나를 내어주었다
탐닉하고 환영해주었다
언젠가 거울을 보고
나를 못난이라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마음에 든다
잘생긴 편이지
그래, 쫌 찢어지고 닳고
흉터와 혹 결점들이 있으나
대체로 나쁘지 않다
잘생긴 편이지
어쨌든 최소한 볼이 아기 엉덩이 같은
영화배우 보다는 내가 낫다

마침내 뜻밖에도 내가 타인에게
진짜 감정을 느꼈다
최근,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침대에 누운 아내를 봤다
머리 형태만 보였다
이불을 뒤집어써 머리 형태만이 있었다
수백 년간 존재했던 산 자와 죽은 자
죽어가는 피라미드처럼
모차르트는 죽었으나 그의 음악은 남아있다
풀이 자라고 지구는 돌아가니
전광판이 나를 기다린다
난 아내의 머리 형태를 봤고
아내는 가만히 있었다
이불 아래에 있는 아내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아내의 이마에 키스하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밖으로 나가서 내 멋진 차에 올라탔다
안전띠를 매고 차를 후진시키니
손가락 끝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가속 페달 위 발까지 온기가 퍼져나갔다
다시 한번 세상으로 들어가
비탈을 달리고 집들을 지나쳤다
사람으로 붐비거나 텅 빈 집들
우체부를 보고 경적을 울렸더니
그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